학령기란 초등학교 입학 직전부터 초등학생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발달과제는 ‘친구 사귀기’이다. 가정에서 부모와의 애착이 부족하다면 사회적 유능감이 부족해서 친구 사귀기에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이 시기에 배워야 할 또 다른 발달과제는 ‘학업 성취를 통한 근면성’이다. 근면성이란 어떤 과업을 완수하고자 노력하는 능력과 부지런함과 집중력과 지구력의 성품이다. 근면성은 과제를 완수했을 때 얻는 만족과 즐거움에서 생기는 것으로써 부모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생긴다. 지금 당장 일등을 하거나 100점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부하는 법을 익히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라고 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처럼 자라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예수님처럼 지혜, 건강,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건강과 지혜를 기르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존감이 높아 세상 가운데서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다. 자존감이 자신에 대한 신념이라면, 용기는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다. 용기는 이미 알고 있는 목표를 위하여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마음이다. 학령기에 필요한 용기를 길러주려면 낮은 자존감을 피해야 한다.
자존감, 곧 자기존중감이란 자기 자신에 관한 생각이다. 만약 자신을 무능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자존감이 낮아진다(Michael H. Popkin, 부모코칭프로그램:적극적 부모역할 159). 자녀를 격려하여 자존감을 높이고 싶다면 하나님의 품성을 길러주어야 한다. 품성이란 한 개인의 가치, 신념, 태도, 행위, 성격 특성을 합친 집합체이다. 품성 교육 인성교육이 자녀에게 긍정적인 성격의 자질을 길러준다는 뜻이다.
좋은 품성은 그릇된 일을 할 수 있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옳은 일을 하려고 하는 용기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이유가 법을 위반하다가 붙잡히면 처벌받을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품성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이런 사람들은 법을 피할 방법만 있다면 얼마든지 법을 비껴갈 것이다.
우리는 자녀에게 두려움에 근거한 순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결국은 옳은 일을 해내려는 성품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때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능력 있고 사랑스럽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좋은 시선으로 보면 자기존중감이 높아진다. 그러면 위험을 감수하려는 마음, 즉 용기가 격려를 받는다. 격려 받아 높은 자기존중감을 가진 아이는 타인에게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연결되고, 일어나는 일에 책임지는 행동을 하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간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이가 있었다. 부모는 그것을 칭찬했고, 아이는 부모의 요구가 부당하거나 버거워도 부모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것을 꾹 참았다. 이것은 칭찬도 올바른 양육도 아니다. 아이의 자기존중감을 억누른 것이고, 부모의 요구가 부당하고 지나쳐서 힘들어도 거부하거나 부인할 용기를 억압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무조건 순종적인 모습도 어쩌면 문제일 수 있고, 정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용기는 잠재력의 심장이다. 용기를 길러주려면 첫째, 장점을 구축해 주어야 한다. 교육학에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이론이 있다. 누구든 장점을 기대하고 격려하면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이 새겨 놓으신 장점이 있다. 은사 없는 사람이 없고 장점 없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그 은사와 장점이 격려 받는 것이다. 장점을 격려할 때 먼저 잘한 것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노력한 부분을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는 자녀의 완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발전을 목표로 해야 한다.
또 부모도 자녀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실수가 벌어진 상황, 곧 미진하고 미완성인 상태를 견딜 수 있다. 혹시 자녀를 훈육해야 한다면, 자녀라는 한 인간의 가치와 그의 행동을 구분해서, 행동만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격과 기질이 합쳐져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독특성을 감지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에디슨과 아인슈타인도 사람들이 단점으로 볼 수 있는 독특성을 그 부모가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놀라운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용기를 길러주려면 둘째, 자녀를 신뢰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엄마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조금만 노력하면 된단다. 힘내라” “도와줘서 고마워” “엄마는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우리 다시 해보자”“실수해도 괜찮아”“너의 그러한 모습이 참 대견하구나”“엄마 아빠는 변함없이 너를 사랑한단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자녀에게 믿음의 담력이 없으면 삶의 영역 곳곳에서 패배자가 된다. 세상은 엄청난 크기로 곧은 요새와 같이 우리를 압도한다. 그런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대로 나아가라. 내가 너희에게 준 언약대로 나아가라’라고 말씀하실 때 용기를 가지고 나아갔던 사람들은 이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살았다. 반대로 물러섰던 사람은 실패자가 되어 긴 고통 속에서 회한을 품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 용기이다.
내 딸과 사위는 코로나19가 활개를 치며 온세상을 잠식할 줄 모르고 2020년 2월 연구년을 맞아 미국으로 떠났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큰 손녀가 그곳 학제에 맞추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낯선 학교생활이 힘들어 매일 울었다. “엄마, 아빠, 학교에도 하나님이 계세요? 나를 여기서도 지켜 주시나요?”학교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없어서 데리러 간 차에 타고나서야 안심하고 도시락을 열어서 먹는 딸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 딸과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카드에 써서 가방에 달아주고, 매일 안고 기도하고 격려하면서 아이가 학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등교하고 2주만에 코로나로 학교 문이 닫히고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길고 긴 코로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봄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데 미국은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 그래서 손녀는 2학년에 배정되긴 했지만 1학기를 건너뛰고 2학년 2학기를 시작한 셈이었다. 딸 부부는 아이의 코치가 되었다. 주중에는 학교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신뢰하고 기다려 주었다. 아이 속의 강점을 길러주었고 잠재력을 믿어주었다. 토요일에는 언어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언어 공부를 시켜 주는 학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한 학기가 후다닥 지나고 8월이 되어, 한 학기만에 3학년에 진급하였을 때 받은 성적표는 다행히 안심할 만큼 되었다. 성적이 되었다기 보다는 부모가 코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거나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자녀 속의 잠재력을 믿고 기다려 주었다.
새 학년이 되고 가을 학기가 지나 겨울방학을 맞이했을 때 손녀는 더는 읽기와 쓰기와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변해 코로나가 종식되어 학교에 갈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아이와 통화하였는데 울며 힘들어하던 아이는 어디 가고,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가 화면에 있었다. “할머니 나는 이제 학교가 재미있어요. 영어도 이제는 두렵지 않아요. 엄마랑 아빠는 우리가 영어를 힘들어 하는 게 당연한 거래요, 실수해도 다시 하면 된다고 했어요”. 딸과 사위는 아이의 상태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손녀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손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미국 학교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영어과제도 힘들어 하지 않고 30여분 동안 과제를 검사하는 선생님과 농담을 즐기는 아이가 되었다. 며칠 전 손녀의 사진을 보니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 보였다. 코치로서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아이 속에서 강점을 끌어내준 딸과 사위가 자랑스러웠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다.
황지영 나무아래상담코칭센터 대표 (고신대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