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협성대학교 선교학 교수로 사역하시다가,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국 총무로 부임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선교’라는 한 길을 가셨는데, ‘선교’에 평생 헌신하시게 된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A-사실 선교라는 말 안에는 ‘보냄을 받은 자’ 혹은 ‘보냄을 받는 자가 받은 사명’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저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신 사명자들이니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사명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명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모두 하나로 품고 선교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이 복음주의 선교이고 존 웨슬리는 철저하게 이 복음주의적 선교를 실천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선교는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의 사명을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 둘을 모두 품고 둘 모두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라고도 합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후예들로 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복음주의 선교를 해 오고 있는 것이고요. 제가 신학을 공부했던 당시에는 이런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습니다. 군목사역을 마치고 미국 애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선교학 교수로 있었던 지난 15년 동안 이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대해서 가르쳤고, 특히 선교적 교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선교에서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이기적 종교집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세상과의 담을 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이고 이런 선교적 교회들의 연합이 선교적 교단인 것입니다.
저는 선교학자로 선교국 총무의 자리로 오면서 이것이 현재 감리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도 없고, 다음세대를 품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변혁시키는 역동성도 회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선교국 총무 자리로 왔고, 앞으로 이 일을 위해서 정진하려고 합니다.
2-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에서 선교국을 총괄하시면서, 어떠한 신학적 방향성을 가지고 사역하실 계획이신가요? 그리고 선교를 꿈꾸고 있는 후학들에게 실제적인 조언과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감리교회의 선교신학은 복음주의 선교신학입니다. 복음주의는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와 구별됩니다. 또 자유주의 신학과도 다릅니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를 하나의 점이나 선으로 보지 않고 폭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폭의 경계를 정하는 기준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 위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면서 개인의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추구하기 때문에 복음주의 선교는 통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현대 복음주의 선교 모토가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자’입니다. 우리 감리교회가 추구하는 선교는 바로 이런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근거한 통전적 선교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복음주의 선교의 특징은 그것이 성경에 충실하고 문화에 적합한 선교정책과 전략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복음은 하나의 절대 불변의 진리이지요. 그런데 이 하나의 절대 진리를 하나의 그릇에 담아 전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복음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은 시대, 세대, 문화, 상황, 환경, 장소에 따라 서로 달라야 합니다.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전략이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절대 진리인 복음을 견지하면서도 다양한 세대와 상황에 맞는 적합한 양식들을 추구하는데 매우 강하다는 것이죠.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의 목소리를 잘 경청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알아야 그 상황에 맞는 양식을 제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양식은 반드시 성경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상황과 성경을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충실하고 상황에 적합한 선교정책과 전략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선교국은 이런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서서 현장의 목소리를 잘 경청하고, 성경에 기초하고 상황에 적합한 건강한 선교 정책들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선교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이 선교하기에 너무나 힘든 상황이지만, 절대로 꿈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세계선교역사에서 선교가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 세계복음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 선교적 사명을 수행할 때 박해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올해 우리 감리교회는 ‘개신교 한국선교 14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행사를 준비하면서 140년 전에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그분들 나이가 대부분 20대였습니다. 본국에서 얼마든지 평화롭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까지와서 복음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들이 이곳에 올 때 여기 와서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잘 먹으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겠다고 오신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사실 죽을 각오를 하고 온 것 아닙니까? 복음을 전해서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야 한다는 그 사명감 하나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민족과 백성들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오늘 선교를 준비하는 다음세대들이 모두 이런 신앙과 정신과 열정을 회복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귀하게 사용하시리라 믿습니다.
3-21세기의 선교적인 방향에 대하여 방향성을 제시해 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21세기는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들이 담겨 있는데요, 먼저 평신도가 세계선교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말이고, 또한 전문인이라고 하는 직업이나 기술을 가지고 선교지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사실 근대선교에서 1910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해입니다. 그때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렸는데 그 대회의 주제가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 이루자’였습니다. 그만큼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전 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던 거죠.
그 결과 오늘 기독교는 세계종교(World Christianity)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세계 복음화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교회도 없고, 성경도 번역되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는 지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지역은 특히 기존의 선교전략과 방법으로는 들어가기가 참 힘든 지역들입니다.
선교사 비자를 내 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기존에 있는 선교사들을 추방합니다. 특히 이슬람권과 힌두권에서 이런 현상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역을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합니다.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들어가서 선교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창의적인 선교 지역’에 창의적인 방법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전문인 선교’입니다. 선교지에 필요한 직업과 기술을 가지고 들어가면 쉽게 진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자 문제도 해결되고, 무엇보다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선교전략은 더 강력하게 요구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선교 현상은 ‘디지털 선교’의 등장입니다. 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 팬데믹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은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하도록 요청했는데 4차 산업혁명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거죠. 따라서 이제 인류는 만나지 않고도 디지털 세계에서 온라인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했는데 요지가 뭔가 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세계에서 경제, 정치, 문화, 종교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선교지라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있다는 점에서 그곳이 분명 선교지가 맞습니다. 앞으로 이 디지털 세상은 더 중요한 선교지로 부상하게 될 겁니다. 특히 다음세대 복음화를 위해서는 디지털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겁니다.
4-올해 감리교회에서는 개신교 선교 14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14개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A-네. 140주년을 맞아 상징적으로 14개의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기념비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영광에 도취 되어 자족하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선교 140주년 기념이 그런 일회성 행사로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이 되고 말 겁니다.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잘한 것은 잘한 것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특히 오늘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혜안을 우리는 과거의 역사속에서 발견할 때가 참 많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어 자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과연 140년 전에 이 땅에 들어와서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한 그 선교사님들의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40년 전보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크게 성장을 했습니까? 또 얼마나 풍요로워졌습니까?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한국교회가 바른길을 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외형은 더 커지고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졌지만, 우리의 신앙은 갈수록 나태해지고 한국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영향력을 갈수록 약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저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이번 140주년 기념 대회를 통해서,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길을 찾고 비전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마지막으로 영화에 관한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가브리엘 오보에’라는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미션’이라는 선교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국주의 선교에 맞서는 두 명의 신부가 나오고, ‘가브리엘 신부’는 탄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하며 순교하고, ‘멘도자 신부’는 탄압받는 사람들을 지키며 함께 싸우다가 순교합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무가 아닌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선교학 교수님으로서 어느 쪽의 선택이 더 맞다고 하실 수 있을까요?
A-좋은 영화지요. 제 선교학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선교적 통찰을 정리하는 과제를 주곤 했습니다.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아마도 가브리엘 신부의 길을 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브리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오보에’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음악이 비장하지만 선교사의 마음을 잘 담아낸 것 같아요. 음악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부드럽고 약해 보여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는 강한 힘이 있잖아요. 가브리엘이 멘도자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해 보이지만 기독교의 정신을 그 안에 담아내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브리엘도 멘도자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귀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싸운 것은 서로에 대해서가 아니라 거대 제국주의의 악과 싸운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볼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이 비록 그들이 마지막에 택한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과 존경심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양극화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박상준 목사(본지 주필, courage123@hanmail.net)